탈레스 이전의 수학(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집트의 수학


1. 발달 배경

  이집트의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므로 ① 홍수가 시작될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 낼 필요가 있었다. 한번 범람을 하게 되면 이집트 전체가 물바다가 되기 때문에 이 범람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아주 치밀한 준비를 해야 했고, 따라서 미리 홍수가 질 때를 알고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② 홍수가 일단 지나간 다음에는 농경지를 다시 정하는 문제가 있었고, ③ 나일강을 다스리기 위한 여러 가지 토목 사업, 즉 운하를 파고 수문(水門)을 만들고 둑을 쌓는 등등의 일이 필요했다.


2. 기원과 연대

  일반적으로 세평과는 달리 고대 이집트의 수학은 결코 바빌로니아 수학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빌로니아의 보다 진보된 경제적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또 바빌로니아는 지정학적으로 많은 대상(隊商)들이 다니는 길목에 위치했지만 이집트는 반고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비교적 평화로운 나일 강은 흐름이 자주 바뀌는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과는 달리 광대한 토목공사나 관리상의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바빌로니아의 수학판이 최근까지 해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집트가 고대의 역사적 조사에 있어서 오랜 동안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 되어 왔다. 그것은 이집트인이 죽음을 경외하였고 또 그 지역이 매우 건조한 기후이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는 무덤과 화려하게 조각된 벽으로 이루어진 사원들을 짓게 했고 후자의 이유가 많은 파피루스와 그 밖의 물건을 썩지 않게 보존하도록 했다. .


3. 산술과 대수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는 모두가 수치 계산인데 대부분 매우 간단한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문제가 실용적인 기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론적 성질을 띠고 있는 경우도 몇 가지 있다. 곱셈의 한 예로서 26과 33을 곱해 보자. 26=16+8+2이므로 33의 배수를 더하면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별표를 달아서 표시한 33의 배수를 더하면 858이라는 답을 준다.

이제 753을 26으로 나누어 보자. 우선 배가를 계속해서 피제수 753을 초과하게 되는 바로 앞까지 제수 26을 계속적으로 배가해 간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므로 위의 열에서 별표시가 붙은 항을 주시하면 몫이 16+8+4=28이고 나머지가 25임을 알 수 있다.

곱셈과 나눗셈의 이 이집트 방식은 곱셈표를 배워야 할 필요를 없애줄 뿐만 아니라 수판에서도 매우 편리했으므로 수판이 이용되는 기간에는 물론이고 그 외의 기간에서도 계속해서 이 방법이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직각을 만드는 아이디어는 3-4-5 (신비한 숫자, 거룩한 쌍)로 이것은 논증이 필요없는 것으로 여겼다.

린드 파피루스와 모스크바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는 실용적인 기원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빵과 맥주의 농도라든가 가축들의 먹이 혼합, 곡식의 저장과 같은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이 중 많은 것이 간단한 1차 방정식에 관한 문제인데 그것을 일반적으로 나중에 유럽에서 임시위치법(臨時位置法, rule of false position)으로 알려진 방법에 의하여 풀렸다.


4.  기하학

  모스크바 파피루스와 린드 파피루스에 있는 110개의 문제 중에 26개가 기하학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땅의 면적과 곡물창고의 크기를 계산하는 데 필요한 측량 공식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원의 면적은 직경의 8/9의 제곱과 같다고 했고 직원기둥의 부피는 밑면의 면적과 높이의 곱으로 구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면적은 밑변과 높이의 곱의 반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보인다. 모스크바 파피루스에는 정사각 피라미드의 절두체의 부피에 대한 정확한 공식의 한 수치 예가 나오는데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고대 오리엔트의 수학에서는 이 공식에 대한 어떤 확실한 예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몇 가지 추측만으로 그 공식이 어떻게 발명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벨(E.T. Bell)이 이 초기의 이집트의 예를 비유하여 "가장 거대한 이집트의 피라미드"라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의 수학


1. 기원

오래된 점토판조차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계산술을 보여주고 있고 또 60진법 위치 체계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졌음을 분명하게 해 준다. 이 초기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떤 판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 화폐, 영수증, 약속어음, 회계, 이익, 저당, 판매, 보증 등에 매우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상업을 하는 회사가 있었다고 기록한 판도 있고 무게나 크기의 체계를 다룬 것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떤 판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 화폐, 영수증, 약속어음, 회계, 이익, 저당, 판매, 보증 등에 매우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상업을 하는 회사가 있었다고 기록한 판도 있고 무게나 크기의 체계를 다룬 것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점토판의 수학 원문을 보면 기원전 2100년경의 최후의 수메르인 시대로 연대가 추정되는 것이 있고, 그 다음 시대로는 기원전 1600년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바빌로니아 왕조인 함무라비 왕 시대의 것이 대단히 많고, 그 다음에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300년까지 이어지는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신바빌로니아 제국시대의 것이 있으며,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와 세레우시단(Seleucidan) 시대의 것도 이어진다.


2. 상업과 농업수학

  가장 오래된 점토판조차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계산술을 보여주고 있고 또 60진법 위치 체계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졌음을 분명하게 해 준다. 이 초기 기간 중의 많은 판을 보면 그 원문의 내용이 농지 매매를 다루고 있고, 또 이러한 거래에 기초한 산술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어떤 판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 화폐, 영수증, 약속어음, 회계, 이익, 저당, 판매, 보증 등에 매우 익숙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상업을 하는 회사가 있었다고 기록한 판도 있고 무게나 크기의 체계를 다룬 것도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한 달력은 아주 초기에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일 년이 춘분에서 시작했다는 점이고 또 첫 달이 황소자리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4700년 경의 춘분에 태양이 황소자리별에 있었으므로 바빌로니아인들이 이미 기원전 4000~5000년 경전부터 약간의 산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산술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쐐기문자라는 독특한 모양의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진흙판에 문자를 새겨 태양열이나 가마솥을 구웠다. 이 진흙판으로 만든 문서는 이집트의 파피루스보다도 시간의 경과에 의한 파손이 적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수를 나타내는 데 두 개의 쐐기문자, 즉 1을 나타내는▼과 10을 나타내는◀을 결합시켜서 이용하였으며 기본적으로 60진법을 사용하였다. 이 경우 2와 61처럼 같은 모양을 갖는 경우가 생기는데 두 문자 사이의 간격을 띄어 61을 표시하였다.(즉 2는 ▼▼, 61은 ▼  ▼로 나타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기수법은 60진법으로 10진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위치적 기수법이었다는 점에서 10진법과 똑같다. 예를 들어,▼▼   ▼▼   ▼▼ 은  2× + 2× + 2× 1 즉, 현재의 아라비아식 10진법으로는 7322 = 7× + 3× + 2×10 + 2× 1로 나타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분수는 주로 천문학자들을 의해서 다루어졌으며 정수를 나타낼 때와 마찬가지로 60진법에 의한 위치적 기수법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이므로 은  22  30 (◀◀▼▼   ◀◀◀)과 같이 나타냈다.

분수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사용한 방식이 이집트인들이 사용한 방식보다 훨씬 실용적이었다.

 

4. 기하학

바빌로니아의 기하학은 거의 실제 측량과 관계된 것이다. 많은 구체적인 예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의 바빌로니아인들이 직사각형의 면적, 직각삼각형과 이등변삼각형의 면적(아마 일반 삼각형의 면적까지 포함한 것 같음). 특별히 평행인 변과 수직인 사다리꼴의 면적, 직평행 6면체의 부피, 더욱 일반적으로 특별한 사다리꼴 밑면을 갖는 직각기둥의 부피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또 원주는 직경의 세 배로 했고 원의 면적은 원주의 제곱의 1/12로 했는데 이는 π=3으로 생각하면 정확한 공식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원주를 360등분하는 것도 틀림없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업적인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원의 넓이를 보통3(r은 반지름)으로 나타내었다. 즉 π=3으로 계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36년에 발굴된 진흙판에는 정육각형의 둘레와 그 외접원 원주 사이의 비를 다르게 계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수학자들이 π의 값으로 3.125를 사용하였다고 추측할 만한 기록이 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수학적 성과가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기하학으로부터 대수학에 걸쳐 훨씬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만 하더라도 이집트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진흙판에는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수학의 성과를 너무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수학이 수치계산이나 대수적 기술면에서 르네상스 초기의 수학과 비슷한 내용을 적지 않게 지녔으며, 또 추상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한 마디로 말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있었다.

 

4. 대수

  기원전 2000년까지 바빌로니아 산술은 잘 개발된 산문 형식의 대수로 발전하였는데 당시에 벌써 2차 방정식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3차 방정식과 4차 방정식까지 논의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표 제작자였으며 고등 기술을 가진 계산가였고 분명히 기하학보다는 대수에 더 강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5. 플림프톤 322

지금까지 분석된 바빌로니아 수학판 중에서 가장 놀랄만한 것은 '플림프톤 322'(Plimlton 322)로 알려진 것이다. 이 이름은 그것이 컬럼비아 대학의 플림프톤 소장품의 목록번호 322라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기원전 1900년에서 기원 전 1600년 사이로 연대가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고어체로 쓰여져 있는데 그것은 1945년에 처음으로 노이게바우어와 사크스(Sachs)에 의해 분석되었다. 직각삼각형의 변의 크기가 될 수 있는 3-4-5와 같은 세 개의 양의 정수의 집합을 피타고라스 3쌍(primitive Pythagorean triple)이라고 한다. 원시피타고라스-3쌍(3쌍이 1외에는 어떤 공통 인수도 갖지 않을 때)이 15개중 13개가 적혀있다. 플림프톤 322에 대한 분석은 바빌로니아 수학판이 대단히 주의 깊게 관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전에는 그러한 판이 단순히 상업적 목적이나 기록으로 간단히 처리되어 왔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수학적 성과가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기하학으로부터 대수학에 걸쳐 훨씬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만 하더라도 이집트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진흙판에는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수학의 성과를 너무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수학이 수치계산이나 대수적 기술면에서 르네상스 초기의 수학과 비슷한 내용을 적지 않게 지녔으며, 또 추상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한 마디로 말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있었다.



 그리스 시대의 수학

 

그리스 이전의 문명 사회, 즉 이집트라든지 바빌로니아에서 기하학을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지식을 실제 생활에 응용하는 데 있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속담처럼, 토지 측량과 토목 공사 등 절실한 현실 문제의 해결에 기하학은 꼭 필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방편으로 그때 그때의 문제들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 수학'은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플라톤 철학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사고의 산물인 수학은 이것과는 성격이 크게 달랐다. 수학은 오직 진리에만 충실했기 때문에 그 수명도 길게 이어져 오늘날 다시 부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던져 준다. 학문이란 너무 현실에만 집착하게 되면 그 생명이 그리 길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일상적인 일들은 모두 노예에게 맡겨 버리고 귀족들은 초현실적인 관념의 세계에만 몸담고 있었는데, 그들의 사치스러운 명상 속에서 얻은 지식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인류역사적으로는 더욱 소중한 유산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너무나 외면한 나머지 마침내는 괴상한 철학(궤변* 철학)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했다.

어쨌든 감각을 떠나서 오로지 이성에게만 호소할 때 비로소 이데아의 세계를 문제삼을 수 있고, 이 이성은 수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다듬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수학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학문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산술은 하찮은 기술이라 하여 고상한 수학과 엄격히 구별되었으며, 그 천한 일은 노예들의 몫이었다. 그런 이유로 유클리드의 《원론》에서는 계산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리스 학문 일반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리스 수학의 특징은 수학자들이라고 해서 오늘날처럼 수학 전문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수학자는 모두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다. '수학을 모르는 자는 철학을 하지 못한다'라든지, '신은 수학적(=기하학적)으로 사고한다'라는 신념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즉, 수학은 그들의 이성적 사고인 로고스,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를 이성적인 것으로 가다듬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따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논리적인 수학, 그것은 계산술이 아니라 기하학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수학을 대표하는 것은 당연히 기하학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미술, 건축, 음악 그리고 심지어는 우주관까지도 모두 기하학적인 조화와 균형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기하학의 정신은 비단 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 인의 온갖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의 수학을 빛낸 사람들에는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등이 있다.

 

<참고자료>


수학의 천재들, 오승재, 경문사, 서울, 1995.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 경문사, 서울, 2000

http://211.40.179.13/book_file/ke10/ke010-031.htm

http://bald.nalove.cc/math/history/egypt.htm

http://210.217.239.15/~sw44/14.%20메소포타미아의%20수학.htm

http://www.bless.pe.kr/~stone/math_w/m-1.htm

http://mathstart.org/che_02/history/his_03.htm

http://my.dreamwiz.com/lyj1009/historyall.htm